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됭케르크 철수작전 (문단 편집) === 독일군의 상황 === 패배라는 걸 모르고 전진해오던 독일 육군은 [[아라스 전차전]]에서 역습을 당했지만, 이내 격퇴하고 다시 진격을 재개하고 있었다. 독일 육군 최선두부대는 사기가 드높았으며, [[하인츠 구데리안]]은 5월 22일, 예하 1기갑사단에게 칼레로, 2기갑사단에게 [[http://ko.wikipedia.org/wiki/%EB%B6%88%EB%A1%9C%EB%89%B4%EC%89%AC%EB%A5%B4%EB%A9%94%EB%A5%B4|불로뉴쉬르메르]][* 파리 근교 [[불로뉴]]가 아니다.]로, 그리고 10기갑사단에게 운명의 땅 됭케르크로 각각 진격할 것을 지시했다. 이들 3개 항구도시는 포위망 안에 있던 연합군이 사용할 수 있는 마지막 항구들이었으며, 독일 육군이 이들 항구도시를 진입, 점령하면 철수는 불가능했다. 다행히 이들 3개 도시에 대한 방어 준비는 그 직전에 간신히 끝났는데, 여기에는 독일군이 연합군의 역습 정보를 듣고 5월 21일, 24시간 공격중지 명령을 내린 행운이 겹쳤기에 가능했다.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6px -10px" [[파일:external/rjburgess.files.wordpress.com/5054785_f520.jpg|width=100%]]}}} || 하지만 결국 5월 25일, 독일 육군 제2기갑사단이 불로뉴를, 26일에는 제1기갑사단이 칼레를 함락시켰다. 됭케르크가 무사했던 이유는 단 하나, 독일군 최고사령부에서 됭케르크를 맡았던 제10기갑사단을 클라이스트 기갑군의 예비부대로 돌리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. 그러나 독일 육군은 이미 5월 24일, 됭케르크에서 불과 15km 떨어진 지점까지 진격한 상태였다. 몇 발자국만 더 내딛으면 됭케르크였고, 철수는 불가능했겠지만… 독일 육군 제4군 사령부는 5월 24일을 기해, 예하 부대에 부대간격 단축 명령을 내렸다. 기갑부대와 보병부대 간의 거리가 너무 벌어졌으니 이를 좁히라는 명령이었고, 당연하게도 보병을 빨리 걷게 할 방법이 없으니 사실상 기갑부대에 이동을 정지하라는 명령이었다. 그리고 뒤이어 전선을 방문한 [[아돌프 히틀러]]도 전군에 진격정지 명령을 하달했다. 이 명령은 5월 26일이 되어서야 철회되었고, 독일군은 5월 27일에야 공세에 나섰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